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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강 포스트모더니즘

아서 댄토

62 년 팝아트를 기점으로 실제적인것인 귀환

유럽식모더니트과 클레멘트의 추상 표현주의 미국식 모더니즘이 생명력이 다한뒤

이후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한다. 그러나 대신 컨템퍼러리 라고 한다

포스트모던은 다른 특정 사조를 지칭할 수 있어 시대 특징 용어로는 부정적

모더니즘 - 예술 언어의 다양성이 나타난단 그러나 의도된 다양성은 아니다, 결과적

다양성 , 새로움의 추구, 전통의 거부, 박물관을 폭파 시켜라 미래파

박물과 예술적 전범 - 고대 그리스에서 완성 - 모방론 - 아름다움의 창출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정점 - 후대를 이를 따라야 하는것=- 과거로 하여금

미래를 지배하는 양식이여서 이를 거부 하기 위해서 박물관을 폭파

낡은것은 나쁜것 - 근대적 시간 관념 - 진보가 좋은것 - 항상

미학적 관념을 갖고 나온다 - 내것이야말로 진정한 새로움 - 이것이 경쟁적

결과적으로 예술 언어가 다양한것이지 - 의도된 다양성은 아니다

포스트 모던 - 아예 다원주의를 의식적으로 추구 목표가 된다

시간 관념 자체가 없다

낡은것이든 새로운것이든 갖다 쓰면 된다, 확립된 전통을 쓰면 안되는 모더니즘과

달리 이것이 무너짐, 의도적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어법과 맞음

의식적 추구 - 이로 모더니즘의 독단주의가 없어짐

아예 미학적 강령이 없다 - 이것만이 새로움이라는 비타협성이 없어진다

예로 클레멘트에서나온 모더니즘의 협소성이 없어진다,

뒤샹과 앤디워홀, 초현실주의를 무시했던 협소성

오리엔테이션이 없어진다 , 일방향적인 시간관념이 없어진다

다원주의 - anything goes

현대인은 시간관념이 다르다.

앤디 워홀이 출발이다 - 사건성을 갯취했다 - 사실 다원주의 잘 안보인다

특정의 예술 언어 - 색분해 - 인쇄 찍어낸듯.

의식적 다원주의와 좀 멀다

차라리 리히터가 다원주의를 의식적으로 추구 했다

386 세대 - 모더니스트들. - 정치적 강령이 있다, 미학적 강령, 삶의 목표가 뚜렷

현시대 그런것이 없다 - 시간 관념이 없다 - 현재 중심이다

- 태도가 일관적이지 않다 - 예술가들이 예언한것

**** 리히터 ******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무규정적인 것을, 무제약적인 것을 좋아한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1966년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여기서 모더니즘은 종말을 고하고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시작된다.

양식의 다양성은 이미 모더니즘에도 나타난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양식적 다양성은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모더니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새로움의 추구’에 있었고,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언어가 다양해진 것일 뿐, 양식의

다양성은 결코 모더니즘의 예술적 목표가 아니었다.

외려 모더니즘의 강령들은 저마다 ‘오직 내 것만이 진정으로 새롭다’는 식의

배타성과 독단성을 갖고 있었다.

**

포스트모던은 다르다. 여기서는 ‘다원주의’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추구된다.

심지어 전통으로 복귀하면 안 된다는 모더니즘의 터부도 포기된다.

**

리히터의 작품세계는 온갖 예술언어로 짜여진 모자이크다.

거기에는 포토 리얼리즘과 같은 사진적 재현이 있는가 하면,

구상성이 배제된 회화적 추상이 있다.

추상의 경우에도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을 닮은 게 있는가 하면,

구성주의나 미니멀리즘, 색면추상과 모노크롬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고,

개념미술에 가까운 게 있는가 하면,

달리나 에른스트처럼 초현실주의적 공간감을 주는 것도 있다.

이렇게 끝없이 새로운 언어를 가지고 나타남으로써

그는 늘 주위를 놀라게 한다. 그의 작품 중에는 심지어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를 연상시키는 낭만주의적 풍경도 존재한다.

물론 한 화가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한 예술가에게서 예술언어의 교체는 통시적으로,

즉 시간의 축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가령 우리는 피카소의 청색시대,

홍색시대, 큐비즘에 대해 얘기한다. 리히터는 다르다.

그는 이 모든 예술 언어를 공시적으로 사용한다.

즉 같은 시기에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예를 들어 사진적 재현에서 회화적 추상으로 스위치 하는 것이다.

그를 “카멜레온”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그의 개인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그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몇 달 전에 서독으로 탈출한다. 그 몇 해 전인 1959년 카셀 도쿠멘타Ⅱ(1959년)에서

잭슨 폴록의 작품을 접했고, 서독으로 망명을 한 후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팝아트를 보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독일에서는 마침 플럭서스의 반(反)미학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독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학적 교리만 배운 그에게

이 모든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개의 전체주의를 체험한 그는 이데올로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정치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예술 이데올로기도 그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가 고정된 양식(style)에 안착하기를 거부하고 끝없이 언어를 바꾸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예술에 하나의 ‘양식’을 강요하는 것은

그에게 “히틀러, 스탈린”이 하는 짓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타일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 사전, 사진, 자연, 나와 내 그림들.

(왜냐하면 스타일은 폭력이고, 나는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독에 망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첫 작품으로

동료 콘라드 피셔와 함께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가구 상점의 공간에 탁자와 소파와 같은 부르주아 생활의 도구가

마치 예술작품처럼 받침대 위에 놓여 있다.

두 명의 예술가는 역시 받침대로 드높여진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정치적 내용의 방송을 시청한다.

그 날은 마침 콘라드 아데나워 수상이 사임하던 날.

이 날을 맞아 서독의 경제기적에 만족해하는

부르주아 시민의 모습을 냉소적 뉘앙스를 섞어 연출한 것이다.

이 퍼포먼스에 그는 <팝과 더불어 살기-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실연>(1963)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가구를 받침대에 올려놓고 작품인 양 기리는 것은

일상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팝 아트의 제스처를 차용한 것이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행위는 플럭서스 퍼포먼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란 제목은 물론 동독 예술의 공식적 강령이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패러디한 것이다.

어쨌든 이 이후 리히터는 자신의 방법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르게 된다.

그는 나찌즘과 스탈린을 겪고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것

13-2

~~

60년대에 리히터는 주로 포토 리얼리즘 작업에 매달렸다.

그가 사진에 매료된 이유 역시 독특한 데가 있다.

회화와 달리 사진은 양식화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진에는 “양식도 없고, 구성도 없고, 판단도 없다.”

“사진은 대상을 회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한다.

카메라는 대상을 이해하지 않고, 그것들을 본다.”

반면 손으로 그린 그림들은 일종의 시각적 종합이기에

“현실을 왜곡시키고 특정한 종류의 양식화로 흘러간다.”

그 결과 현실은 이미 알려진 것으로 상투화되고 정형화된다는 것이다.

~~

1966년에 제작된 <8명의 학생 간호사>(1966)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에서 뽑은

여덟 장의 흑백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같은 해 7월 시카고에서 일어난 대량 살인 사건의 희생자라고 한다.

언뜻 보면 사진 같으나 실은 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1988년에 제작한 <베티(663-5)>(1988)를 보자.

이 역시 10년 전에 찍은 딸의 사진을 베껴 그린 것이다.

그림을 완성한 후 그는 이를 다시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고 한다.

이로써 사진과 그림 사이의 경계는 유동한다.

~~

1964년 이래 그는 ‘아틀라스’라는 이름 아래 여기저기서 오려 낸 사진첩을 마련해두고,

거기서 골라낸 사진을 원작회화의 밑그림으로 사용해 왔다.

이 점에서 리히터의 작업은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닮았다.

하지만 워홀과 달리 리히터는 제 작품이 정말 사진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팝아트보다 하이퍼 리얼리즘에 가깝다.

하지만 하이퍼 리얼리즘이 사진보다 더 높은 해상도를 구현하려 한다면,

리히터는 이들(하이퍼 리얼리즘) 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초점을 흐려서

그의 ‘푼크툼’은 대상의 윤곽을 흐리는 데에 있었다.

가령 바더 마인호프 연작을 생각해 보자. <1977년 10월 18일의 죽은 자>(1988)는

테러를 저지르다가 체포되어 옥중에서 연쇄 자살했던 독일 적군파들의 죽음을

다룬 연작 중의 하나다. 테러리스트를 소재로 삼았다고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 작품은 작가가 테러리스트들에

은밀한 동정을 품은 게 아니냐는 억측을 낳기도 했다.

이 작품은 대상의 윤곽을 사정없이 흐려놓아 마치 초점 맞지 않는

사진처럼 보인다. 왜 그는 이렇게 작품의 윤곽을 흐리는 것일까?

어떤 이는 이것이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흐리기 위한 장치라고 말한다.

뵐플린 이래로 우리는 대상의 윤곽을 흐리는 게 회화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윤곽 흐리기는 사진에 마치 터너의

안개 그림이나 인상주의자의 작품처럼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다른 목소리에 따르면 거기에는 대상에 손대기를 꺼려하는 모종의

“접촉공포”가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윤곽 흐리기는 대상을 손으로 잡지(把握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작품에 최종적인 의미를 주지 않으려는 장치라고도 한다.

이로써 대상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은 채 열리게 된다.

1986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리히터는 이렇게 말했다.

“유일하게 역설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언제나 적절한,

구성된 모티브로 완결된(closed) 사진을 얻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는 데,

조금씩, 조금씩 그 의도를 파괴하여,

마침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에는 개방성(openness)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리히터는 포토 리얼리즘 작업과 나란히

추상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포토 리얼리즘의 구상과

모더니즘의 추상이라는 두 개의 극단이 동시에 공존하게 된 것이다.

리오타르의 설명에 따르면 현대예술은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고 한다.

즉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이 세상에 묘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어조로 리히터는 이렇게 말한다.

16.00

“추상화는 구상적 모형이다. 그것은 우리가 볼 수도, 기술할 수도 없으나,

분명히 존재함을 알고 있는 어떤 현실을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것, 파악할 수 없는 것, 한계가 없는 것이라는

부정적 개념으로 표시한다. 그것을 우리는 수천 년 전부터 천국,

지옥, 신과 악마라는 그림으로 대체하여 묘사해 왔던 것이다.

추상회화와 더불어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직접 다가갈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추상회화는 직접적인 직관성 속에서 예술의 모든 수단을 가지고

무(無)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

20세기 예술은 크게 사진을 이용한 ‘복제미학’과, 주로 회화를 이용한 ‘숭고미학’의

두 흐름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서로 대립되는 이 두 개의 물줄기가 재미있게도 리히터에게서는 하나로 합류한다.

리히터는 끝없이 언어를 바꾸어 왔다.

이 운동은 때로 극에서 극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언어를 바꾼다고 해서

예전에 사용하던 언어가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제라도 과거의 언어를 끄집어내어 다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

리히터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reality)이었다.

하지만 그 현실은 어느 하나의 그림 혹은 텍스트 안에서

단 한번에 남김없이 포착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결코 손으로 잡지 못하는 채 현실에 접근하려는 끝없는 시도뿐이다.

데리다의 텍스트가 결코 초월적 기의(현실)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표의 무한연쇄의 놀이를 하듯이, 리히터의 그림도 결코 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의 현실은 수많은 예술언어들의 놀이를 풀어놓으면서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춘 채 늘 우리의 손아귀(把握)를 빠져나간다.

이렇게 리히터는 80년대에 비로소 전면화하는 어떤 경향, 즉 포스트모던의 시대정신을 구현한다.

13-3

◆ 철학과 도시건축

~~

예로부터 건축과 철학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를 건축가에 비유했고,

중세인들은 신의 세계창조를 즐겨 건축가의 작업으로 묘사했다.

~

근대철학의 창시자 데카르트는 철학적 사유를 건축에 비유했고,

독일 관념론의 선구자인 칸트는 “순수 이성철학의 본래 이념은 건축적”이라고 말했다.

비록 건축이라는 장르를 예술발전의 낮은 단계에 놓았지만,

근대철학의 정점인 헤겔 철학은 그 자체가 거대한 건축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서구의 형이상학

전체가 ‘건축에의 의지’ 위에 놓여 있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실제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형이상학은 모든 지식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토대 위에 체계적으로 쌓아올리려는 ‘건축에의 의지’위에 서 있었다.

건축, 그것은 서구 형이상학을 지탱해온 사유의 이미지였다.

~

20세기에 들어와 이 사유의 이미지가 붕괴한다.

수학에서는 괴델이 자기완결적인 건축에의 의지가 수학에서조차

불가능함을 증명해 버렸다.

철학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이상언어로 세계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리려던 꿈이

그릇된 망상임을 깨닫고 철저한 건축적 원리로 쌓아올렸던 자신의 초기철학을 부정한다.

근대적 ‘건축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던의 철학은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등장하기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포스트모던의 사상적 선구로 여겨지는 니체마저도

건축의 은유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이란 “움직이는 토대 위에, 흐르는 물 위에 삶과 사유의 구조물을

건축하는 건축의 천재”였다. 한 마디로 건축의 바닥을 이루는 기초,

즉 철학적 정초주의(Fundamentalismus)는 붕괴했어도,

움직이는 토대 위에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인간의 천재성은 살아남은 것이다.

실제로 포스트모던의 사상들은 니체가 말한 그 건축물을 닮았다.

움직이는 지각, 흐르는 강물 위에서 모빌처럼 움직이는 건축물들.

건축이 종종 철학의 은유로 사용되어 왔지만, 정작 철학에서 도시건축에 관한 언급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그 중에 나는 딱 두 가지를 알고 있다. 하나는 데카르트의 언급이다.

“오직 하나의 건축가가 기도하여서 성취한 건물은 여러 사람이 각각 다른 목적으로

만든 낡은 벽들을 고쳐가면서 지은 건물보다 훨씬 아름답고 더 잘 정돈되어

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조그만 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고대 도시들은

한 사람의 기술자가 자기의 환상대로 그린 대도시에 비하여 훨씬 덜 정돈되어 있다.

한편으로 한 기술자에 의해 구상된 도시에서 그 각각의 건물들을 따로 떼어서

생각해 볼 때에도, 만약에 우리가 그 건물들이 어떻게 배치되었으며,

또 크고 작은 집들과 그것들이 꼬불꼬불하고 부정형한 거리를 어떻게 이루고

있는가를 볼 때에, 순차적으로 여러 사람에 의해 발달된 도시보다도 더 기술적이다.”

(<방법서설> 제Ⅱ부)

한 마디로 여러 건축가의 생각이 모여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고대도시보다

단 한 사람의 계획에 의해 체계적으로 건설된 근대도시가 더 질서정연하고,

때문에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시건축을 바라보는 데카르트의 취향을 볼 수 있다.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제시한 사유의 이미지는 이렇게 한 사람의 건축가에 의해

통일적, 체계적으로 지어진 질서정연한 계획도시를 닮았다.

이 통일성, 체계성, 인공성이 바로 근대의 인식론적 이상이자 동시에 도시건축을

바라보는 근대의 미적 취향이었다. 재미있게도 이 데카르트의 취향이 수백 년 후에

전통과의 과격한 단절을 주장하는 ‘근대주의’(=모더니즘)라는 형태로 반복된다.

가령 ‘파리의 구(舊)시가를 밀어버리자’고 했던 르 꼬르뷔지에를 생각해 보라.

도시건축을 사유의 이미지로 제시한 또 한 사람의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러니까 <트락타투스> 시절에 그가 꿈꾼 이상언어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인공언어였다. 그러나 그의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적 탐구>에서 그는 이와는 전혀 다른 언어관을 제시한다.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오래된 도시로 간주될 수 있다. 즉 골목길들과 광장들,

오래된 집들과 새집들, 그리고 상이한 시기에 증축된 부분을 가진 집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미로.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곧고 규칙적인 거리들과

획일적인 집들을 가진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들.” (<탐구>§18)

도시건축에 관한 데카르트의 언급이 실은 그의 철학적 합리주의의 이미지였듯이,

오래된 도시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 역시 그의 후기 철학의 은유이다.

위의 언급 속에서 “미로”란 우리의 혼란하기 짝이 없는 일상언어를 가리키고,

파리의 라데팡스나 서울의 강남과 같은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는 과학적 필요에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형식언어,

즉 수학, 화학, 물리학 등의 인공언어를 가리킨다.

세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혼란스러운 일상언어를 없애고

그 자리에 질서정연한 인공언어를 만들려고 했던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마치 모던의

건축을 위해 파리의 구시가를 없애려고 했던 르 꼬르뷔지에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제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근대를 특징지었던 이 언어관을 폐기하고

일상언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철학적 전회는 동시에 건축을 바라보는

그의 미적 취향의 전회이기도 했다. 이는 그가 이 철학적 전회 후에 자신이

과거에 지은 건물에 혹평을 한 데서 잘 드러난다.

최근 철학에서 논의되는 도시건축은 대개 이 이미지를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가령 데카르트가 말하는 근대도시,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만들어내려

한 이상언어는 한 마디로 ‘명석 판명함’이라는 근대 합리주의 인식 이상의 표현이다.

이 인식 이상 속에서는 개별 요소들이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어 명확한 동일성을

가지면서 전체를 관장하는 한 건축가의 계획 아래 질서정연하게 배열된다.

여기에는 타자의 시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고, 전체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

요소들도 없다. 이 근대적 인식 이상이 또한 근대의 ‘문화’ 개념이었다.

실제로 근대 민족국가 시대에 ‘문화’는 한 민족, 한 언어의 정체성으로 규정되고,

밖에서 들어온 요소는 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흐리는 불순물 내지 이물질로 여겨져

간단히 배제되곤 했다. 그리하여 근대의 ‘문화’ 개념은 한 문화의 안쪽으로는 강한

동질성을 요구하면서 밖으로는 배타성을 띠고 있었다. 그 예를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심한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오래된 도시”를 사유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면

문화에 대해 이와는 좀 다른 관념을 갖게 된다. 한 마디로 문화의 순수성,

동질성에 대한 강박을 가진 폐쇄적인 단일문화가 아닌 다양한 요소들이 공존하며

다른 이질적 요소들에 개방된 다문화(Kultikultur)의 개념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의 도시 속에는 옛 도심이 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사후에

증축된 구역이 있으며, 외곽에는 계획에 따라 지어진 근대주의 건축의 구역이 있다.

여러 문화의 층위가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 도시의 삶은 더 이상

과거 민족국가 시대처럼 단일문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미 다양한 문화의

층위가 혼재한다.

**포스트모던은 하나의 단일한 언어로 도시전체를 획일화하는 데에서

벗어나 이렇게 이미 다양하게 분화하여 공존하는 여러 문화의 층위들을 고려한 새로운

도시건축을 지향한다.

~~

독일의 미학자 볼프강 벨쉬는 이 다문화의 공존을 “초(超)문화성”(Transkulturalit t)이라

특징지으며, 이것이 현대 건축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밝힌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가령 I.M. 페이(루브르 피라밋 건축가)가 보스톤에 세운

‘John Hancock Tower’(1966-76)는 미국식 마천루에 아시아적 취향을 가미한

복합언어를 사용한 건물인데, 각자 다른 생활방식을 가진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고루 상찬을 받는다고 한다. 두 번째는 재미있게도 르 꼬르뷔지에의

‘Carpenter Center for visual Arts’(1963)다. 하바드 주변에 세워진

이 건물은 하바드의 다른 건물들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전형적인

르 꼬르뷔지에의 양식을 고집하며 서 있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 건물이 다른 건물과

대조를 이루면서 모종의 초문화적 분위기를 풍기고, 바로 이 일탈이 그러지 않았으면

지루했을 하바드의 건물들에 생기를 준다는 것이다.

***세 번째 예는 파리에 있는 장 누벨의 ‘Institut du Monde Arabe’(1987)이다.

이 건물 벽에 달린 수많은 렌즈들은 적정량의 일광을 건물 안에 받아들이도록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조리개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렌즈들은 하이테크의 산물로 읽히는

동시에 아랍의 전통적 문양으로도 읽힌다.

~~

**한 마디로 I.M 페이의 작품은 한 건축물

안에서, 르 꼬르뷔지에의 작품은 다른 건축물과의 앙상블 속에서,

장 누벨의 건물은 동일한 요소의 이중적 독해 속에서 각각 초문화성을

독특한 방식으로 구현한다는 것이다.

~~

이어서 그는 초문화성의 원칙이 도시건축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지 밝힌다.

이제까지 포스트모던에 관한 논의가 개별 건축물로 이루어져 왔고,

그것을 도시건축에까지 확장시키는 논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에 그의 논의는

아직 추상성을 벗지 못한다. 어쨌든 그에 의하면 미래의 도시는

“이행의 가능성을 허용하고, 다의성을 포함하며 통과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미래의 도시는 자기완결적이며 폐쇄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소통의 망들이

교차하는 지점이 되어야 한다. 즉 토박이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거기에 사는

사람에게도 정체성을 주어야 한다. 근대의 도시건축에서는 토박이들이 그 안에서

완전한 정체성을 갖는 반면 타향인들은 그곳을 고향으로 느끼지 못했다면,

미래의 도시건축은 이 구별을 없앤다는 것이다. 이 개방성이 도시 고유의 얼굴을

지워버릴지 모른다고 특정한 고향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시도는 역사적 퇴행일 뿐이다.

물론 미래의 도시의 초문화적 정체성에도 코스모폴리탄적인 요소와 함께 지역적 요소가

공존하기에, 미래에도 도시 건축가는 여전히 지역적 정체성을 구현하는 과제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때 그는 특정한 도시를 특정한 정체성의 족쇄 속에 집어넣어 획일적인

정체성을 창출하지 말고, 끊임없이 다른 정체성의 내용과 형식에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근의 철학에서 도시건축을 논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다.

이 논의가 기호학과 언어철학에서 도시건축에 접근하는 방식이라면,

여기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생태론적 통찰에서 얻어진 시각으로 도시건축과 자연의 관계를 논하는 방식이다.

물론 그 어느 것이나 우리 사회와는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서구에서 도시건축을

논하는 시각이므로, 그것을 곧바로 우리 현실에 대입하여 우리의 도시를 읽을 수는 없다.

우리의 도시를 읽는 데에는 좀 더 면밀한 경험적 관찰을 통한 패러다임의 수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철학만의 힘으로는 어렵고, 철학과 건축학 사이의 학제간

연구를 필요로 할 게다.

우리의 수도는 지난 40여 년간 우리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근대화의 역사를 기록한

텍스트다. 한국에서 ‘근대성’의 개념을 얻으려면 바로 이 텍스트를 읽어내야 한다.

구시가를 흔적도 없이 밀어버린 서울은 한국적 근대의 반(反)전통주의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똑같은 형태와 색깔로 도배가 된 얼굴 없는

도시의 획일성은 근대의 기능주의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극단적 ‘근대’는

근대건축의 유일한 장점조차 갖지 못한 듯하다. 즉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신도시 서울에는 심지어 계획성조차 없어 보인다. 바로 이것이 한국적 ‘근대’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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