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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의 철학 - 제 11 강 팝아트
제11강 팝아트
“왜 변기는 화장실과 미술관에서 다른 취급을 받는가?”
이것이 뒤샹이 제기한 문제라면, “왜 브릴로 박스는 슈퍼마켓과 미술관에서
다른 취급을 받는가?”는 앤디 워홀이 실천하고, 단토가 제기한 문제다.
“무엇이 예술작품인가?” 과거에는 이렇게 작품의 본질을 물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언제 예술작품인가?”
한 마디로 작품의 ‘본질’을 묻는 대신에, 한 사물을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조건’을 묻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는 점에서,
뒤샹과 워홀은 서로 맥이 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변기와 박스가
추구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전략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전시회에서 보는 뒤샹의 변기도
원작이 아니라 50년대에 다시 제작된 복제들 중의 하나다.
만약 이 복제가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게 아니라면,
그리하여 이제는 사라져 전설이 된 그 원본(?)을 대체하기 위해
수공업적으로 제작된 것이라면 (유감스럽게도 이 부분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레디메이드’가 아닐 것이다.
워홀의 브릴로 박스 역시 누구나 알다시피 애초부터 널빤지에
아크릴로 그린 것이다. 그의 캠벨 수프 깡통도 비록 슈퍼마켓의
전시대 위에 놓인 것처럼 전시되었지만 실은 실제의 깡통이
아니라 그려진 이미지다. 이 역시 엄밀한 레디메이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워홀-마릴린 먼로> <워홀-코카콜라병>
그것은 가짜 레디메이드, 즉 레디메이드의 모조(fake)다.
이 모조 레디메이드는 원본과 복제의 전통적인 위계를 무너뜨린다.
원래 복제는 원작을 베낀 것이다. 워홀은 이 상식을 뒤집는다.
자본주의적 생산(production)은 하나의 프로토타입을 이용해 똑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복제(reproduction)의 성격을 띤다.
슈퍼마켓에 쌓여 있는 브릴로 박스 역시 기계로 찍어낸 복제들이다.
하지만 워홀은 널빤지와 아크릴를 이용해 이 복제를 흉내낸다.
이렇게 창조된 워홀의 박스는 작가의 손길을 거친 원작이고,
그것의 모델이 된 것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복제품이다.
한 마디로 그는 복제로 원작을 베끼는 게 아니라 거꾸로
원작으로 복제를 베꼈던 것이다.
여기서 워홀은 갑자기 회화(원작)로 사진(복제)을 모방하는
하이퍼 리얼리즘의 선구가 된다. 물론 그에게는 극사실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없고,
하이퍼 리얼리즘에는 복제를 수없이 반복하려는 의도가 없지만.
어쨌든 원본으로 복제를 베끼는 워홀의 모조 레디메이드에는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없애려는 다다의 강령을 넘어서는 다른 전략이 들어 있다.
바로 ‘시뮬라크르’의 전략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워홀은 사진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그는 평면에 슬라이드를 비추어 그 윤곽을 따,
거기에 채색을 하여 마치 색 분해한 네거티브 필름 같은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들을 수십에서 수백 번 반복하여,
한 장의 사진으로 시뮬라크르들의 계열을 만들어낸다.
‘시뮬라크르’란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개념으로, 본디 ‘복제의 복제’를 가리킨다.
그러다가 그 의미가 확대되어, 이제는 원본 없는 복제, 혹은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까지도 가리키고 있다. 워홀이 그린 먼로의 이미지는
사진을 베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복제의 복제’다.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아틀리에에 먼로를 모델로 세우지 않았다.
그 연작은 그녀의 사후에 나왔다. 따라서 그것은 ‘원본 없는 복제’다.
하지만 그렇게 제작된 복제의 이미지가 그에게는 실제의 먼로보다 더 중요하다.
때문에 그것은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다.
그는 실제로 살아 숨쉬는 먼로라는 인물을 수십 번 반복되는
복제 이미지들 속으로 녹아 사라지게 만든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림보다는 미디어를 통해 한 인물의 인격이 더 잘 전달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앤디 워홀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그냥 내 그림과 영화의 표면을 보고 나를 보라.
그러면 거기에 내가 있다.” 이렇게 그는 제 자신의 존재를 복제 이미지들의
표면으로 규정한다. 먼로도 마찬가지다.
워홀이 사랑한 것은 저 유명한 여배우 자신이 아니라,
미디어로 만들어진 이미지다. 피상적 이미지 뒤에 숨어 있는 그의 진정한 모습?
이 따위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가 아는 마릴린은 어차피 미디어의 산물,
복제 이미지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진짜 마릴린은 있는 그대로의 마릴린이 아니다.
미디어에 의해 각색된 대로의 마릴린이다.
먼로의 이미지 너머? 사진 너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11-2
과거에 그림은 자연의 ‘거울’이었다. 혹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이었다.
그때에 우리의 눈은 캔버스의 표면에서 바깥의 자연을 보거나,
혹은 화폭을 뚫고 나가 그 너머에서 세계를 보았다.
하지만 워홀의 작품은 다르다. 그것의 표면은 바깥의 자연을 비추지 않고,
화폭의 뒤에 있는 외부의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피상성. 그것이 만들어내는 복제 이미지들의 표면.
그의 세계는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거울은 무엇을 비추는가?
“아직까지도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그 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과거에는 텍스트도 자연의 거울이었다. 혹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이었다.
그때 우리의 눈은 텍스트의 지면에서 바깥의 자연을 보거나,
혹은 책을 뚫고 나가 그 너머에서 세계를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텍스트는 더 이상 거울의 바깥을 비추지 못한다.
데리다의 말대로 “텍스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현대는 미디어가 생산하는 복제 이미지들로 만들어진 세계다.
우리는 그 가상의 세계 밖에, 미디어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또 다른 세계,
더 참된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 믿는다.
워홀은 이 낡은 인식론적 신념의 불필요성, 나아가
그 믿음의 성립불가능성을 말한다.
오늘날 실재는 대량으로 복제되는 이미지들 속으로 해체되어 사라지고 있다.
데리다는 차이의 놀이 속으로 최종적 의미(시니피에)의 사라짐을 말한다.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이미지의 연쇄를 무한히 늘려나가면서
워홀은 비슷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똑같은 사물을 더 많이 볼수록,
의미는 점점 더 사라지고, 당신은 더 공허하게 느낄 것이다.”
배고프고 고독한 예술가가 아니라 돈과 명예를 좇는 팝스타가 되려고 했던
워홀의 존재미학은 7, 80년대 미국문화의 피상성을 반영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더 이상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어느새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뒤샹은 평범한 것과 미적인 것의 경계를 허물려고 했다.
워홀 역시 같은 목적으로 두 영역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개념,
즉 ‘독창성’의 신화를 파괴하려 한다.
여러 번 반복되는 그의 이미지들은 마치 기계로 찍어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독창적이거나 개성적으로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작품을 만드는 이는 굳이 워홀이 아니어도 좋다.
“누군가가 내 대신 내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제 작품들이 자기 없이 마치 자기 스탭들이
만들어낸 것인 양 얘기하고 다녔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남들이 그렇게 여기기를 바랐다.
둘 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려고 하나,
그 일을 하는 뒤샹의 제스처가 광대의 몸짓이라면,
워홀의 그것은 기계의 동작이다.
뒤샹이 범상한 현실과 미적 가상의 경계를 지워버렸다면,
워홀은 그것을 넘어 가상 속에서 현실을 사라지게 만든다.
현대예술을 “무가치하다”고 혹평했던 보드리야르가 유독 뒤샹과 워홀만은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초미학’이라 불렀다.
뒤샹의 초미학은 실재를 가상의 세계에 등록시키려 한다.
워홀의 초미학은 거꾸로 가상을 실재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뒤샹과 워홀을 서로 이어주면서 동시에 구별해주는, 초미학의 두 단계다.
팝아트 ;
실제가 사라지고 가상이 세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