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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강 해프닝과 개념 예술

◆ 퍼포먼스

그린버그는 잭슨 폴록의 작품에서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

회화 매체의 평면성을 보았다. 해롤드 로젠버그가 보기에 폴록의

작업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과정’이다.

물론 그의 작품에는 강한 표현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작품 자체의 미적 구성에서가 아니라

그림이 생성되는 과정의 에너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젠버그는 폴록의 작업을 “액션 페인팅”이라 불렀다.

이 표현은 전후미술이 나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방향을 지시한다.

즉 작품의 제작보다는 과정의 연출에 더 주목하는 행위예술의 가능성이다.

미학적 perfome ; 관념을 물질속으로 넣는 행위

남는 작품 자체는 중요한게 아니다, 퍼포먼스 흔적.. 중요하지 않다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색면 추상 - 작품을 공예품으로 - 작품과 사람이 만나는 사건 이 중요 - 이것도 퍼포먼스

SPCAE 를 PLACE 로 바꾸는것

action painting - 이것도 퍼포먼스

◆ 무너진 라오콘

작품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행위예술의 경향은

이미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직접적인 선구는 존 케이지로 봐야 한다.

그 유명한 <4분33초>(1952)를 위해 케이지는 곡을 쓰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은 오직 소음과 사건을 조직하는 것뿐이었다.

이 전설적인 공연에 내포된 가능성은 얼마 후 새로운 예술운동으로 전개된다.

1959년 뉴욕에서 케이지의 제자인 앨런 카프로는

<여섯 파트로 된 열여덟의 해프닝>이라는 이름의 리사이틀을 연다.

그 이후 5~60년대를 풍미하던 이런 부류의 예술운동은 일반적으로

“해프닝”으로 불려지게 된다.

여기서 미술은 연극과 비슷한 것이 되고 만다.

미술이 이런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물론 그린버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일찍이 그는 <더 새로운 라오콘을 위하여>(1940)라는 논문에서

다른 것과 구별되는 회화매체의 고유성을 강조한 바 있다.

회화란 자기 고유의 매체, 즉 캔버스의 사각형과 화면의 평면성에 대한 탐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해프닝은 회화를 엉뚱하게 연극과

비슷한 장르로 만들어버린다. 이는 모더니즘의 강령에 내포된

‘순수주의’의 원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Modernism)은 ‘추상회화’만을 포괄하는 협소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심지어 다다이즘과 초현실주를 위한 자리조차 없었다.

그에게 다다이즘은 한갓 ‘진기함’의 제스처로,

초현실주의는 낡은 구상을 사용하는 ‘키치’일 뿐이었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배제하는 한 그린버그는 모더니즘(modernism) 자체에

캔버스를 떠나려는 충동이 들어있음을 볼 수 없었다.

그린버그의 “더 새로운 라오콘”은 세우기도 전에 이미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1910년대에 뒤샹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라오콘

예술을 구분

최초의 비교 미학

음악 - 시간 예술

회화 - 공간 예술

장르의 매체의 차이를 드러냄

그린버거 - 자기 지시성 - 칸트 - 모던의 지시성 - 회화는 회화라는 수단으로 자기

자신을 탐구 하는것

회화 연극화 - 다른 매체를 탐구 - 그래서 더 새로운 라오콘을

그래서 끌여 들인 버넷 뉴먼 마저

색면 추상 - 체험이 중요시

미니멀리즘 - 공간을 조직 하는게 중요 일상 사물로. 회화가 액자를 벗어나 바닥으로

관객이 중요 , 관객과 작품이 벌이는 관계놀이가 중요

이미 초기부터 ( 잭슨폴록부터 ) 퍼포먼스의 요소가 이미 내제

해프닝의 부정정 사용

◆ 일어남

오늘날 ‘해프닝’이라는 말은 다분히 부정적 뉘앙스로 사용된다.

그것은 아마도 최초의 ‘해프닝’을 보고 대중들이 느꼈던 충격의 기억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최근에는 ‘해프닝보다 ‘퍼포먼스’라는 말을 더 즐겨 쓰는 듯하다.

하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퍼포먼스’보다 실은 ‘해프닝’이 철학적으로 더 심오한 표현이다.

‘퍼포먼스’가 이 예술의 행위적 성격만을 강조한다면,

‘해프닝’이라는 말은 이 새로운 예술 속에서 발생하는

진리의 성격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 예술가와 주체 사이에서 벌어짐을 강조 - 훨씬 철학적 -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진리의 사건적 성격을 강조한 바 있다.

예술 안에서는 진리가 일어난다(geschieht). 작품의 진리는 사건(Ereignis)이다.

과거의 철학이 예술에서 자연의 모방, 대상의 모사, 현실의 반영만을 본다면,

하이데거는 예술에서 다른 것을 기대한다.

작품 앞에 서면 무언가 예기치 않았던 일이 우리 앞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은 바로 이 해프닝, 즉 ‘벌어짐’, ‘일어남’, ‘발생함’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근원적인 존재체험, 이것이 바로 예술 속에서 일어나는 진리사건이라는 것이다.

고흐의 전통적 고전 회화

기존의미학적 틀에서 숭고의 체험을 했다

미적 대상 - 미적 지각 - 미적 주체가 - 즐겁더라 -- 이런 틀로는 설명이 안된다

열려서 미처 몰랐던것이또하나의 세상이 열려서 보여주는 것을 체험했다

진리가 일어난다 발생한다

예술작품을 체험 하는것을 다이나믹하게 바꾸었다

근대 미학 - 예술 작품의 진리 - 일치의 진리 - 얼마나 많이 닮았냐 - 모방의 진리

하이데거 - 깊은 진리가 있다 - 구두가 뭔지를 알게 되었다 - 농민의 터전이 열려서

보여진다 - 대지와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지점이 도구 이고 구두 이다

깨닫지 못한것이 열리면서 도구에 대한 새로움이 열렸다

사건처럼 다가온다 를 강조함

그래서 탈근대적 틀로 넘어감

진리의 사건적 성격들

해프닝 - 벌어짐 - 사실은 철학적 깊은뜻

퍼포먼서 - 객관적 사건의 벌어짐

사건성 - 현대 예술속 깊게 들어와 있다

진짜 훌륭한 작품은 - 터너가 안개를 그린 사건 -

미적 주체성 - 근대적 관념

작품의 진리 - 예술가 위, 관람자 위에 있다

12-2

하이데거는 작품과 관객의 만남을 일종의 ‘사건’으로 보고 거기서 예술의 본질을 찾는다.

사실 ‘사건성’은 이미 현대예술 속에 깊숙이 들어와 앉아 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아름다운 대상을 보러 전시회에 가지 않는다.

충격적인 사건의 벌어짐, 어떤 새로운 것의 일어남.

현대예술의 전시회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죤 케이지의 ‘이벤트’든, 카프로의 ‘해프닝’이든,

요셉 보이스의 ‘액션’이든, 퍼포먼스는 현대예술 자체에 내재된 사건적

성격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건성 - 현대 예술에서 매우 중요

저자의죽음 (롤랑바르트)

소위 “퍼포먼스적 전회” 이후 해프닝은 오늘날 예술수용의

일반적 모델이 되어버린 감이 있다.

가령 버넷 뉴먼의 색면추상을 생각해 보라.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무언가가 일어난다.

그 앞에 선 관객은 일상적 공간(space)이 아닌,

어떤 신비한 장소(place)에 있게 된다.

관객은 작품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흐르는 전율과 함께 어떤 뜨거운 열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 현상을 뉴먼은 ‘숭고’라 불렀다.

숭고의 효과는 분명히 존재하는 ‘대상의 지각’이 아니라 일어나는 ‘사건의 체험’이다.

◆ 연극과 제의

그린버그와 그의 제자들은 미술이 ‘연극성’을 띄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렇다면 퍼포먼스를 정말로 연극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퍼포먼스는 연극처럼 ‘무대’라는 장치를 동원한

미적 가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대 위에 올라가 미적 허구가 되는 게 아니라, 무대 밖으로 걸어 나와

일상의 연장이 되고자 한다. 즉 미적 가상 속에서 연출되는 상황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이 되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퍼포먼스는 팝아트 혹은 미니멀리즘을 닮았다.

퍼포먼스가 연극적 성격을 띤다면, 그것은 좀 다른 의미에서다.

아득한 과거에 모든 연극은 종교적 의식이었다.

그때 연극은 주기적으로 진리를 일으켜 체험시키는 행사였고,

거기에는 모든 성원이 참여해야 했었다.

퍼포먼스 역시 사건을 일으키고 그 존재의 체험에 관객을 참여시키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퍼포먼스는 근원적 형태의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 미적 허구가 되기 이전, 배우와 관객이 분리되기 이전,

그러니까 아직 ‘재현’이 되기 이전의 제의(재림)를 닮았다.

재림 - 재현

퍼포먼스는 관객을 사건에 참여시킨다.

여기서 관객은 그저 미적 허구의 감상자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의 증인이 된다.

사건은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사건이 될 수 없다.

증인이 참여하여 그 사건의 벌어짐을 증언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건은 ‘사건’으로 참되게 일어날 수 있다.

‘사건’을 일으키려면 관객의 ‘참여’가 필요하다.

성만찬은 관객의 참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도들의 참여가 있어야 빵 조각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퍼포먼스 역시 마찬가지다.

관객의 참여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는 사건으로서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 영매

예술이 ‘사건’이 되면 종교적 체험에 가까워지는 걸까?

하이데거는 예술수용을 ‘봉헌’이라 불렀다.

이는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는 그리스인들의 체험에 가깝다.

뉴먼에게 작품의 수용은 ‘마콤’이라 불리는 성소(聖所)의 체험을 의미했다.

이는 호렙산에서 야훼를 접한 모세의 체험과 다름없다.

존 케이지는 선(禪)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콘서트에 참가한 사람들은 마치 묵언수행을 하는 선승처럼

마음을 비우고 ‘무’(無)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보다 좀 더 근원적, 혹은 원시적인 체험도 있다.

1964년 요셉 보이스는 베를린에서 장장 9시간 동안 바닥에 누워 있는

이벤트(<추장-플럭서스 송가>)를 연출했다.

바닥에 누운 그의 머리와 발쪽에는 두 마리의 죽은 토끼가 놓여 있었다.

천에 감싸인 예술가는 “우우” 하는 깊은 신음소리를 냈고,

이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증폭되어 전시장과 거리 밖으로 중계되었다.

“내가 내는 이 소리는 의식적으로 동물에게서 따온 것이다.

나는 이를 인간을 넘어서는 다른 존재형식과 접촉하는 방식으로 본다.”

여기서 예술가는 죽은 동물을 대신하여 말하는 샤먼이 된다.

보이스의 퍼포먼스는 실제로 샤머니즘의 제의를 보는 듯하다.

1965년에 열린 전시회에서 보이스는 죽은 토끼를 가슴에 안고

장장 세 시간에 걸쳐 그에게 회화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었다.

그 구구한 ‘설명’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로써 그는 인간의 의미론을 포기하고, 그 너머에서 영혼의 비합리적인

세계와 소통하는 길을 열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술가는 어떤 창조적 에너지,

신비한 지식의 영매(靈媒)가 된다. 예술이 사건이 되면, 작가는 영매에 가까워진다.

예술이 사건이 되면 작가는 영매에 가까워 진다

12-3 시작

개념 예술 - 머릿속에 든 컨셉이 예술작품의 본질이다 . 이것이 실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앤디 워홀은 말로 지시만 내리고,

그것의 실행을 작업팀에게 맡기곤 했다.

팝 아트에서 시작된 이런 작업방식은 미니멀리즘으로 계속 이어졌다.

가령 <죽다>(1962)라는 작품을 제작할 때 토미 스미스가 한 일이라곤

공업사에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린 것뿐이다.

솔 르 위트 역시 그 유명한 ‘벽 그림’(wall drawing)을 제작할 때

작품의 제작을 인부들에게 맡겼다.

그는 그저 반복적인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에 필요한 공식을 제시했을 뿐이다.

“생각(idea)이 작품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

비록 개념미술이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났지만,

그것의 단초는 이렇게 팝 아트와 미니멀리즘에 마련되어 있었다.

아니, 개념미술의 역사는 어쩌면 그보다 더 길지 모르겠다.

1910년대 말에 뒤샹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며,

그림을 그리지 않는 최초의 화가(?)임을 선언한다.

개념미술은 그때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그 후 그는 오로지 ‘개념’만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의 레디메이드를 예술로 만들어준 것은 오브제의 물질성이 아니다.

그 짓궂은 제스처를 통해 표현된 정신적 관념(concept)이다.

말로 하는 명령, 글자로 된 작업지시, 행동을 지시하는 스코어.

이런 것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을 때, 회화는 문학에 가까워진다.

이때 화가는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하는 게 아니라 잡지에 기고하게 된다.

실제로 요제프 코주트 같은 화가는 ‘예술-언어’라는 잡지에 작품을

기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로서의 내 역할은 작품의 출판과 더불어 끝난다.

나는 출품의 형식을 바꾸어 (…) 잡지에서 공간을 얻었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작품의 비(非)물질성을 강조하고,

그로써 회화에 대한 모든 연결을 끊으려 한다.” 회화는 이제 문학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념미술은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에 대한 안티테제다.

이 유명한 비평가는 모더니즘의 정신을 매체에 대한 반성에서 찾았다.

자연을 탐구했던 고전예술과 달리 현대회화는 회화 매체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념미술에 이르러 회화는 물감과 화폭을 떠나 다른 매체가 되었다.

행위를 지시하는 악보가 되고, 언어를 재료로 한 문학이 되었다.

이로써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도 종언을 고한다.

그리스 고전예술의 종언, 서유럽 근대예술의 종언,

여기에 아메리카 모더니즘의 종언을 더함으로써

개념미술은 헤겔의 예언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

뒤샹에서 팝 아트와 미니멀리즘으로 이어지는

어떤 경향이 1960년대 말에 개념미술로 전면화하는 데에는 배경이 있었다.

때는 마침 지식계에서 텍스트로의 전환(textual turning)이 이루어지던 시기.

기호학은 사진 이미지 속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드러내 언어로 보여주었다.

이것이 형상을 거부하고 언어를 재료로 하는 미술의 관념으로 이어진 것이다.

게다가 화가들 사이에는 아직 제도미술을 거부하는 아방가르드적 제스처도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 결과 상업화를 거부하기 위해 아예 팔릴 수 없는 작품을 만들자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개념미술에는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여러 나라의 화가들이 참여했고,

그 화가들의 예술적 배경 역시 매우 다양했다.

딱히 누구부터 개념미술가로 보고, 딱히 어디부터 개념미술로 규정해야 할지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요제프 코주트는 미니멀리즘의 전사(前史)에 속한다.

개념미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솔 르 위트 역시 미니멀리스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쨌든 그가 <아트포럼>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개념예술에 관한 패러그래프들”(1967)이라는 글은 오늘날 개념미술의

강령처럼 여겨지는데, 거기서 그는 개념미술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했다.

“아이디어 혹은 개념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예술가의 목표는 제 작품을 관찰자에게 정신적으로 흥미롭게 만드는 것.

따라서 그는 작품이 정서적으로는 건조하기를 원한다.

눈의 지각에 호소하는 예술은 개념적(conceptual)이라기보다는

지각적(perceptual)이다. 시각화되지 않아도 아이디어 자체로도

완성된 산물 못지않은 작품이다.

어떤 이들은 새 재료를 새 아이디어로 혼동한다.

위험한 것은 재료의 물질성을 너무 중요하게 만들어

그것을 작품의 컨셉트로 삼는 것이다. 아이디어들은 숫자, 사진,

낱말 혹은 그 어떤 것이라도 좋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물론 개념미술 역시 물감을 사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개념 미술 역시 유리와 형광등과 종이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다.

그 형식을 빌려 구현되는 개념 혹은 관념,

이것이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작품은 물리적 대상에서 정신적 관념으로 거처를 옮겼다.

되돌아보자. 미니멀리스트 저드에게 작품은 ‘사물’이었다.

미니멀리스트 모리스에게 작품은 ‘지각’이었다.

미니멀리스트 솔 르 위트에 이르러 작품은 마침내

‘개념’이 된다. 미술은 더 이상 망막적(retinal)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mental) 현상이다.

“‘그린다’는 말이 꽃, 여인, 에로틱, 일상 환경, 예술, 다다,

정신분석, 베트남 전쟁을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화가가 아니다.”

프랑스의 작가 다니엘 뒤랑의 말이다.

뒤샹과 코주트에 이어 그도 화가이기를 포기한다.

대신에 그는 줄무늬 간판을 등에 지고 파리의 거리를 활보하며 모든 곳을

미술관으로 만드는 개념을 실천했다. 한나 다보벤은 숫자와 글자와 낙서를

계열적으로 늘어놓음으로써 회화가 일종의 글쓰기라는 관념을 표현하려 했다.

일본의 작가 온 카와라는 매일 6~7시간에 걸쳐 캔버스에 그 날의 날짜를 적어 넣고,

그 아래 그날 벌어진 사건을 보도한 신문을 첨가하였다.

60년대 말에 등장한 개념미술은 70년대 말이면 이미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미술 전체가 ‘개념미술’이라 할 수 있다.

‘개념미술’ 이전에도 미술은 개념적이었다.

가령 뒤샹의 레디메이드들을 생각해 보라.

변기는 그 물질성 때문에 작품이 된 것이 아니다.

‘개념예술’ 이후에도 미술은 개념적이다. 오늘날의 예술은,

그것이 물질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든지 관계없이,

어느 정도로는 모두 개념적(conceptual) 배경을 갖는다.

예술에서만이 아니다. 오늘날 ‘컨셉트’라는 말은

예술의 범위를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는 일상용어가 되어버렸다.

현대 미술 전체가 개념미술이다

재현을 포기하고 형식으로 - 형식을 포기 물질로 - 물질 자체를 포기하고 개념으로

재현이 중요 했다면 현대는 컨셉이 중요

아름다움이 중요한게 아니고 새로움이 중요

창작은 ‘제작’의 행위에서, 작품은 ‘재료’의 감옥에서, 수용은 ‘지각’의 관례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예술의 육신은 죽고, 영혼만 남았다.

예술은 마침내 비물질성(immateriality)에 도달했다.

이로써 예술이 영혼처럼 결코 파괴될 수 없는 불멸성(immortality)에 도달할까?

어쨌든 오늘날 개념미술이 꿈꾸던 유토피아가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최근 컴퓨터와 인터넷의 새로운 미디어 환경은 삶으로 실현된 개념미술이다.

모니터 위에서 보는 이미지들은 모두 디자인, 스크립트, 혹은 프로그래밍의 산물.

한 마디로 개념(concept)으로 빚어내는 비물질적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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