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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옵아트

‘옵아트’는 단명했다. 3년 남짓 지속된 데에 불과하다.

느닷없이 줄무늬 옷의 모드로 차용되는 바람에,

오늘날에는 패션쇼와 관련하여 그 이름이 가끔 신문에 오르내릴 뿐이다.

전성기에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실패했고,

지금은 미술사 책 속에서 다분히 주변적인 현상으로 다루어진다.

착시를 이용한 시각의 놀이가 유치하게 여겨진 것일까?

하지만 탈근대를 지향하는 최근의 철학적 분위기와 컴퓨터가 주도하는

최근의 미디어 환경을 고려할 때, 옵아트라는 현상을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옵아트는 당시의 예술계를 주도하던 팝아트에

맞서는 거의 유일한 안티테제였다. 팝아트와 더불어 실재적인 것이

귀환하던 시절에 옵아트는 그 요란함에 맞서 홀로 비재현적 추상미술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옵아트가 추상표현주의의 적자인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옵아트는 추상표현주의와 대립한다.

액션 페인팅이나 타쉬즘이 뜨겁게 표현적이라면,

옵아트는 차갑게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물감을 뿌리고 흘리는 추상표현주의와 달리,

옵아트의 화가들은 수학적으로 정제되고 기하학적으로 정교한 작업을 원했다.

간섭효과, 잔상효과, 요철의 전도. 1964년 ‘타임매거진’은 이런 기법을 사용하는

예술에 “옵티컬 아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옵아트’라는 약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 다음 해인 1965년에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이 새로운 유형의 예술을 위해

기획전을 연다. ‘반응하는 눈(Responsive Eye)’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옵아트는 관찰자의 지각을 도발하고, 그 반응을 유발하는 예술이다.

다양한 착시의 효과로 관찰자의 망막에 과부하를 걸면, 관찰자는 끝없이 눈을 움직여

그림 속에서 안착할 지점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늘 좌절하고 만다.

눈은 끝없이 방황하고, 지각의 만족은 영원히 유예된다.

옵아트는 눈에 부담을 주어, 관찰자를 짜증나게 만든다.

이처럼 관찰자의 지각에 고도의 노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옵아트의 선구를

쇠라와 들로네에게서 찾기도 한다. 쇠라의 점묘법은 관찰자의 눈에 색을 혼합하는

과제를 부여한다. 옵아트가 등장하기 몇 십 년 앞서서 이미 ‘지각’을 회화의 주제로

만든 것이다. 한편, 들로네는 색조의 “동시적 대조”를 통해 화폭에

공시적 운동(synchronic movement)을 만들어낸다.

그의 오르피즘은 여기서 우주의 드라마를 본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옵아트 속에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옵아트의 탄생에 직접적 자극을 준 이는 독일에서 건너온 바우하우스의

화가 요제프 알버스다. 언뜻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처럼 단순해 보이는 그의 작품은

실은 관찰자를 조금 번거롭게 만든다. 겹겹이 둘러싼 정사각형들의 색조가 나란히

배치되면서 시각에 간섭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이 세상에

고정된 형태나 색채란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작업은 원래 바우하우스에서 하던 시각

실험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실제로 연습을 해보면 착시를 통해 색의 상대성과

불안정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시지각에서는 물리적 사실과 심리적 효과 사이에 편차가

생긴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리적 사실과 심리적 효과 사이의 편차. 여기에 옵아트에서 추구하는 효과가

적절히 요약되어 있다. 한 대상이 물리적으로 특정한 속성을 갖고 있다 해서,

그것이 관찰자의 눈에 그 모양 그대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선(線)과 형(形)과 색(色)이라는 물리적 사실도, 그것이 우리 눈에 들어와

심리적 효과가 될 때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옵아트는 그 편차 속에서 움직인다. 그 편차가 또한 옵아트에 운동과 지속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물리적으로는 전혀 움직이지 작품으로 하여금 심리적으로는

끝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아니, 이게 그저 운동과 지속의 ‘환영’에 불과할까?

옵아트 중에는 소토의 작품처럼 실제로 키네틱을 이용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화면 위에서 가상의 운동을 발생시키는 이른바 “평면-키네틱”이다.

이 평면 위의 움직임은 들로네가 보여준 것처럼 색채의 “동시적 대조”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 가령 보색효과를 통해 파랑에 둘러싸인 빨강은 주황으로 물들고,

노랑에 둘러싸인 빨강은 물들어 보라가 된다. 아울러 운동은 같은 형태의 반복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점은 흔들리고, 선은 물결치고, 면은 오목과 볼록의 교차를

반복한다. 한 마디로 공간적 병존을 통해 시간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옵아트 하면 떠오른 이름 중의 하나가 브리짓 라일리다. “내게 자연은 풍경이 아니라

시각적 힘들의 역동성이다. 그녀의 작품 <물결>(1964)을 생각해 보자. 위에서 아래로

그려진 수많은 곡선들이 화면에 크고 작은 물결을 일으켜, 바라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게

만든다. 키네틱 아트가 아니다. 분명히 정지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관찰자의 눈은

그 안에서 수많은 운동을 보고, 그 속도감에 아찔한 현기증까지 느끼게 된다.

라일리에게 자연은 “현상이라기보다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시간이 정지된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옵아트가 내는 “공시적 운동”의 효과다.

작품이 유발하는 시각적 도발의 강렬함에 비해 라일리의 미학적 강령은 생각보다 온건하다.

“나의 개념은 열린, 평평한 공간, 예컨대 폴록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다초점의 공간”이다.

폴록처럼 원근법적 환영과 구성적 중심을 포기하고 화면을 균등한 평면으로

다루는 ‘올오버’를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격렬한 표현적 제스처 대신에 수학적 냉정함을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아가 팝 아티스트와 달리 복제 아닌 원작을 지향하는

것도 추상표현주의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평면성과 원작성을 고집함으로써

라일리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에 충실하려 한다.

옵아트를 대표하는 또 다른 이는 헝가리 출신의 화가 빅토르 바사레이다.

라일리의 옵아트가 추상표현주의를 잇고 있다면, 바사레이의 옵아트는 팝아트와 닿아 있다.

“예술의 생산물이 감식안을 가진 엘리트들의 테두리에서 튀어나오지 못한다면,

예술은 질식사할 운명에 처할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작품’이라는 표현 대신에

‘생산물’이라는 낱말을 쓰고 있다. 실제로 그의 아틀리에는 거의 실험실이나 매뉴팩처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워홀처럼 바사레이 도 작품의 원작성을 거부했다. 자기가 없어도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원했던 것이다.

바사레이에 따르면 작품이란 모름지기 언제든지 반복가능하고, 얼마든지 증식 가능해야

하며, 어떻게든 변경 가능해야 한다. 이 시대의 예술은 글자 그대로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기본 모티브를 반복하여 사방으로

증식시켜 나가는 가운데 조금씩 뉘앙스를 변화시키는 계열적 작업방식을 사용했다.

그렇게 만든 작품은 요즘 물리학에서 말하는 프랙털 구조, 혹은 그 옛날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브루스터 경(卿)아 만든 만화경을 연상케 한다. 만화경의 효과도 마주보는

거울을 이용해 하나의 모티브를 대칭구조로 무한히 복제하는 데에 있지 않은가.

라일리와 바사레이는 옵아트의 가진 두 개의 상반되는 가능성을 각각 대표한다.

라일리의 옵아트가 원작성을 고집한다면, 바사레이는 예술의 복제성을 강조한다.

라일리가 순수하다면, 바사레이는 정치적이다. 바사레이는 그 누구라도 만들 수 있는

그런 예술을 원했다. 굳이 복잡한 비평적, 도상적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맨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원했다. 라일리의 옵아트가 엘리트주의적이라면,

바사레이의 것은 민주주의적이다. 때는 마침, 196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급진적인

학생운동이 정점에 달한 시절이 아니었던가.

이제 왜 “옵아트라는 현상을 좀 더 진지하게 볼 필요”가 있는지 드러난다.

수학적 디자인, 계열적 처리와 같은 옵아트의 작업방식은 그것이 행해지던 60년대보다는

차라리 오늘날 컴퓨터가 주도하는 미디어 환경에 더 어울린다. 그 뿐이 아니다.

그 동안 옵아트는 주로 ‘지각’의 심리학이라는 측면에서 현상학적으로 설명되어 왔다.

하지만 그 동안 철학의 분위기가 6, 70년대와는 현저히 달라졌다. 옵아트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려면 이보다는 좀 더 깊은 철학적 해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옵아트를 올려놓을 해석의 지평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계속 암시했지만, 한 마디로 옵아트에는 탈근대적인 측면이 있다.

가령 옵아트에는 처음과 끝이 없다. 부분과 전체도 없고, 주변과 중심의 구별도 없다.

따라서 작품에 최종적 의미를 부여하는 특권적인 지각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는 어떤 ‘봄’이든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다. 때문에 관찰자는 늘 자신의

시각 경험을 곧바로 의심에 붙여야 한다. 관찰자의 시선은 화면에서 중심을 찾지 못한다.

시각의 만족은 영원히 유예된다. 정착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눈은 항상 새로운 의미를 찾아,

새로운 지각을 찾아 화면을 이리저리 떠도는 노마드가 된다.

니체적인 측면이 있다고 해야 할까? 옵아트 앞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잊고 놀이를 하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된다. 놀이에 몰두한 아이에게 시간은 정지된다. 아니, 그는 다른

종류의 시간대에 살게 된다. 옵아트의 체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리적 움직임은

없는데도, 요란한 심리적 움직임이 있다. 여기서 운동은 통시성이 아니라 공시성의

축을 따른다. 시간은 멈추었는데, 사건은 무한히 반복하여 일어난다. 아무 시간도 아닌

것이 모든 시간을 포함한다. 정중동(靜中動), 혹시 이게 니체가 말한 영겁회귀의

놀이가 아닐까?

62 년

실제적인 것의 귀환

추상미술의 전통을 이어감

액션페인팅 - 표현적 뜨겁다

옵아트 - 차갑다, 이성적 이다

갑섭 잔상 효과

64 년 타임매거진 - 옵티컬 아트

65 년 MOMA - 반응하는 눈

관찰자의 지각을 도발

눈에 과부하, 불안을 줘야 한다

눈을 괴롭혀야 한다

관찰자를 짜증나게 한다

쇠라. 점묘법이 출발선

지각을 회화의 주제로 만든것

오르피즘 - 우주의 드라마

탄생 ; 요제프 알베스 - 물리적 시지각과 심리적 사실사이의 편차를 이용

평면 키네틱. - 실제 움직이진 않는데 움직이는 것 처럼

공간 예술에 시간성이 도입

통시적 - 나무가 수직으로 자라는것 - 시간성이 있다

공시적 - 나무를 잘라서 나이테를 보는것 - 공간적 개념

수학적 냉정함

팝아트와 달리 평면성과 원작성을 고집

빅토르 바사르

팝아트와 연결이 된다

예술 생산물.. 작품 대신 생산물이라 한다

원작성을 거부

언제든 반복 가능 증식 가능

프랙탈 - 눈송이 육각형이 모여서 또 육각형을 만듦

탈근대적 측면

처음과 끝이 없다

부분과 전체가 없다

주변과 중심이 업다

특권적 지각이 없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다

정착의 안락함을 포기

눈은 이리저리 떠돈다

놀이에 몰두한 아이와 같다 - 시간이 정지한다

물리적 움직임은 없다 - 그럼에도 움직임 무한한 움직임이 있다

통시성이 아니라 공시성의 움직임

사건은 멈췄는데 끝없이 움직임

볼때 마다 움직임

아무 시간도 아니것이 모든 시간을 포함한거다

니체 - 영겁 회귀 시간 과 같다

매트릭스

불교적 시간관

유한한데도 무한성이 들어 있다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영겁 회귀 돌고 도는 시간성

데리다 ; 작품의 최종적인 해석은 있을수가 없다

텍스트의 의미가 없다

해석의 놀이를 통해 해석이 생산된다

ㅇ원래의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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