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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예술의 철학 - 제 10 강 반미학
제10강 반(反)미학
다다이스트들이었던가? 처음으로 ‘반(反)미학’을 외쳤던 것이.
그 후로 60년대에도 비슷한 얘기가 다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미학’이 19세기까지 서양예술을 지탱해 왔던 예술원리들을 해체하는 전략을 가리킨다면,
20세기 예술사 전체가 이 낱말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와 고전예술의 원리는 하나씩 해체되기 시작한다.
현대예술은 더 이상 정신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감각적 매체가 아니다.
주제(Thema)는 사라진다. 게다가 더 이상 가시적 사물의 재현도 아니다.
이로써 제재(sujet)마저 사라진다. 그럼 남는 것은? 내용 없는 형식의 유희,
메시지 없는 순수한 형태와 색채의 구성뿐이다.
해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에서 형태와 색채의 유희는
얼음처럼 응고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아직 사각의 ‘형’과 검정의 ‘색’이 남아 있다.
앵포르멜의 화가들은 형태마저 해체시켜 회화를 질감(matiere)으로 환원시킨다.
이제 캔버스 위에는 무정형의 물감 자국만 남게 된다. 모노크롬 계열의 작품들도
형태를 없애고 캔버스 전체를 오로지 하나의 색깔로 채운다.
색채마저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 폰타나는 마침내 색채마저 없애버리고,
텅 빈 화폭에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은 칼자국만 남겼다.
반미학의 해체전략은 이렇게 철저하게 실현되었다.
<뒤샹-샘> <뒤샹-자전거 바퀴>
그 뿐인가? 그림에서 액자가 사라진지도 오래 되었다.
액자는 범상한 현실과 미적인 가상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액자의 안쪽은 가상의 세계요, 액자의 밖은 현실의 세계다.
액자의 안쪽은 미적인 가치의 세계요, 그 바깥은 범상한 사물의 세계였다.
하지만 뒤샹이 미술관에 변기를 들고 나타나면서, 이 경계마저 무너진다.
소위 ‘레디메이드’라는 이름으로 범상한 현실의 사물들이 미적 가상의 세계라는
액자 안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화장실에서 배설물을 받는 변기가 졸지에 작품이 되자
최소한 그것보다는 품위가 있는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도 예술이 될 권리를 얻는다.
그래서일까? 뒤샹의 변기는 몇 십 년 후 워홀의 브릴로 박스로 환생한다.
‘반미학’의 전략은 범상한 것과 미적인 것의 경계를 없앤다.
액자가 사라지자 모든 것은 예술이 되고, 예술은 또한 모든 것이 된다.
예술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예술이 되었다. 이로써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가 도래한다.
과거에 부르주아들은 현실을 지루한 산문(prosa)으로 만들어놓고,
그 무미건조한 잿빛 세계를 치장할 장식품으로 미적 운문(poesie)을 창조했다.
현실은 추해졌고, 아름다움은 액자에 갇힌 가상으로만 존재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반미학’의 전략은 이 부르주아적 미적 가상을 파괴하려 한다.
이 파괴는 액자로부터 예술을 해방시켜서, 현실 자체를 예술로 만들려는
유토피아의 전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평범한 것의 변용.’ 신약성서에 따르면 엠마오 마을로 가던 예수의 제자들은
길에서 낯선 나그네를 만나 그와 동행하게 된다.
저녁에 여관에 들어 함께 식사를 하던 중, 그 낯선 사내의 얼굴이 빛을 발하면서
예수의 그것으로 변했다고 한다. 범상한 인간이 갑자기 성스런 존재로 변한 것이다.
이를 신학에서는 ‘변용’(transfiguration)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찬란한 변용의 순간을
카라바지오의 작품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변기를 예술로 만듦으로써 뒤샹은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을 이 미적 가치의 빛을 발하는 작품으로 변용시켰다.
이로써 예술을 현실로 실현하고, 세계 전체를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가 도래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미국의 미학자 아서 단토에 따르면
평범한 사물이 작품이 되는 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그 사물을 해석의 대상으로 만들어주는 ‘이론’이다.
다른 변기들은 사용의 대상이지만, 뒤샹의 변기는 해석의 대상이다.
둘째는 그 사물을 역사 속에 위치시켜 줄 ‘예술사’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사를 요약하는 자기 고유의 방식이 있다. 제 작품을 그 역사의 연속선 위에 올려놓을 때
평범한 사물도 예술사의 사건이 된다.
셋째는 그 사물에 작품의 자격을 수여하는 어떤 ‘제도’다.
소위 작가, 평론가, 큐레이터 등 소위 ‘예술계’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평범한 사물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변용’의 메카니즘이다.
성과 속, 가상과 현실, 미적인 것과 범상한 것의 경계는 최종적으로 사라졌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추구하던 유토피아가 실현되었다.
이제 범상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
차별은 사라지고 범상한 사물과 아름다운 예술 사이에 완벽한 평등이 지배하는
미적인 민주주의, 예술적 무정부주의의 낙원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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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의 반미학
앤디 워홀의 팝아트 전략
반 미학
모더니즘의 가장 래디컬한
반미학 - 총체적 근대 예술 문화에 대한 공격이다
뒤샹은 반미학은 강하고 비 미학이라고 했다
근대 예술 - 미적인 것 일상적인것, 양자를 분리,
변기를 넣어서 미적 영역을 붕괴 시킴
1 차 모더니즘 - 뒤샹 오브제 전략 - 일상 사물을 예술로 끌어 들임, 꼴라주
2 차 모더니즘 - 팝 아트 , 만화, 마릴른 몬로 - 광범위한 예술로 편입
20 세기 - 반미학의 경향들
19 세기 서양예술 지탱 예술 원리 해체 가 반미학
20 세기 는 반미학의 경향들
현대예술은 주제 테마는 이미 오래전 사라짐 , 가시적 테마도 아님
남는것 메시지 없는 순수한 색채와 형태의 유희
해체는 여기서 멈추지 않음
말레비치 - 형도 사라지고 색도 사라짐
모노크롬으로간다
나중에 색채 마저 포기
공간으로 간다
앵포르맬 - 형 마저 포기 질감으로 표현 - 촉각적인 느낌으로 형을 망가뜨림
유럽의 추상 표현 주의
잭슨 폴록 - 이미 형은 무너짐
질감을 가진 물감으로 돌아감
모노크롬 - 캔버스를 하나의 색으로 채움
반미학의 해체 전략이 철저히 실현됨
그림에서 액자가 사라짐
미니멀리즘 - 그림이 벽에 걸려 있는한 가상성이 있다 - 나와야 한다 바닥으로 - 받침대도 없이
예전에 액자란 - 범상한 현실과의 경계
레디메이드 범상한 일상이 미적 공간으로 쳐들어옴
액자가 사라지자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예술은 모든 것이 되었다
THe return of Real ; 실재적인 것의 귀환 62 년 - 팝아트를 칭함
고상한 물건이 아닌 일상의 허접스런 물건이 돌아옴
신리얼리즘 ; 일상 사물이 들어오는것
모든 것이 예술에 들어올 권리를 획득한것
예술이 거꾸로 모든 것이 될수 있다 - 광고가 아름다워짐, 디자인 , 인테리어
미적 가상을 깨겠다..
아방가르드 대부분 좌파 - 사회에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재 관계
근대적 예술 문화를 부르조아적 이라 했다
미적 가상을 깨서 ....
미술이 상업적 이윤 추구, 기득권의 거부
예술을 액자로부터 깨서 예술을 일반에 전파 유토피아적
평범한것의 번영 tranfiguration of common place - arthor danto
변기가 미적영역으로
그렇다면 다른변기는 왜 예술이 아닌가?
변용 ( 얼굴이 변하는것 )
변기 - 평범 - 이것이 변용된다
뒤샹의 변기 화장실 변기 - 물리적 속성은 같다
예술이 되는것은 해석의 대상이 될 때다
평범한 사물이 작품이 될 때
1. 이론 의존적 , 해석 대상
2. 예술사 를 요약하는 고유의 방식이 있다, 미술사의 연속성 위에 올려 놓을때
3. 작가 평론가 큐레이터등 작품으로 인정하면 - 졸지의 평범이 예술로 간다
차별이 사라짐 - 범상과 예술
예술적 미적 민주주의
예술적 무정부 주의
10-2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오랫동안 예술을 해 왔던 목적이 아니었던가?
그 목적을 이루자 예술은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예술과 현실이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때 예술은 더 이상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단토가 고전예술의 죽음을 예언한 헤겔의 뒤를 이어 다시
‘예술의 종언’을 얘기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하긴 그 동안 해보지 않은 실험이 또 뭐가 남았는가?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보드리야르 역시 ‘예술의 종언’을 얘기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죽음을 맞고 있다.
변기와 박스, 넥타이와 침대, 만화와 사진.
한편으로는 범상한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있다.
다른 한편 예술은 모든 것이 되고 있다.
오늘날 예술은 액자에서 뛰쳐나와 광고로, 디자인으로, 삶의 스타일로 실현되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게 예술이 되고,
예술이 모든 것이 되는 이 ‘초미학’(transaesthetic)의 상황.
이 지점에서 예술은 더 이상 현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가치의 영역으로서
존재하기를 멈추고 뜨거운 죽음을 맞는다. 현실에 실현된 미적 유토피아는
결국 예술에 초래된 디스토피아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것을 유토피아로 보든, 디스토피아로 보든,
이들의 말대로 현실과 예술을 가르는 장벽이 정말 허물어질 수 있을까?
보리스 그로이스에 따르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반미학’을 실천했던 아방가르드 예술의 모토는 ‘새로운 것’의 추구였다.
과거의 예술이 그리스 예술을 전범으로 삼아 ‘낡은 아름다움’을 지향했다면,
현대예술은 ‘새로움의 충격’을 지향한다.
액자의 사라짐이라는 것도 실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극단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떤 것이
새로울 수 있는 것은 어떤 조건 아래서인가?
낡았다고 여겨지는 다른 것과 대비되는 한에서이다.
따라서 낡은 것 없이는 새로운 것도 없다.
그렇다면 새로움으로 낡은 것을 대체하려는 모더니즘 예술의 목표는
논리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
낡음과 새로움이 논리적으로 상대를 전제한다면,
예술과 현실을 가르는 벽은 사라질 수가 없다.
그것은 논리적 불가능이다. 가령 뒤샹의 변기,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비록 화려하게 작품으로
변용되어 ‘문화적 문서고’ 안에 입성했지만,
그것으로 범상한 것과 미적인 것을 나누는 액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범상한 것이 문화적 문서고 안에 받아들여져 미적 가치를 지니게 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 반대의 사태가 벌어진다.
즉 이제까지 미적 가치를 지닌다고 여겨져 왔던 것들이 문화적 문서고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누군가 여전히 고전주의적
풍경을 그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조잡한 ‘키치’로 간주될 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일상과 예술의 벽을 허물려 했으나,
그 운동이 벽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벌어진 것은
범상한 영역에 속하는 것들과 미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들 사이의
부분적인 자리바꿈일 뿐, 일상과 예술을 가르는 액자는 논리적으로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아방가르드의 예술강령은 파탄을 맞는다.
현실의 일부가 예술이 되고, 예술의 일부가 현실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어떤 경우에도 현실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없고,
예술 자체가 현실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도래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우울함 속에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따라서 예술은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이리라.
<샘>이라고 했던가? 내가 실제로 본 것은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 그 변기가 아닐 것이다. 수십 년 뒤에,
그러니까 50년대에 다시 제작한 몇 개의 변기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언젠가 어느 전시회에서 우연히 ‘그’ 변기를 보았다.
‘반미학’의 정신에서 탄생한 작품을 대하는 관객의 태도는
그 역시 반미학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미적 대상은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문화적 가치이나,
일상적 대상은 맘대로 만져도 되는 실용적 물건이다.
변기에 손을 대려 접근하는 순간, 경비를 서던 박물관 직원이 다가와 나를 제지한다.
그러고 보니 변기에서는 뭔가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변기가 아니라 ‘바로 그’ 변기였던 것이다.
뒤샹은 그 변기로 대체 뭘 하려고 했을까?
변기를 미술관 안에 들여보냄으로써 그 안에 보존된 미적 가치들의
아우라를 파괴하려 했을까? 그렇다면 그의 시도는 실패했다.
아니면 미적 가치의 문서고 안에 변기를 집어넣음으로써 변기에
미적 가치의 아우라를 뒤집어씌우려 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의 시도는 성공했다.
하나의 변기는 성공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변기들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미술관에서는 변기를 한 개 이상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변기가 성공을 거두는 순간,
다다이스트의 반미학의 전략은 총체적인 실패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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