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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라짐의 미학

 

 

현대 회화는 눈으로 읽어낼것이 없고

밑에 깔려 있는 철학적 바탕이 중요해 졌다

 

 

 

 

하이퍼 리얼리즘이란  ;

  복제 미디어 감정이 우리나라에서 물성에 대한 탐구로 이해가 달라짐

  실제 같은 모사가 중요한데, 모사는 사물성을 강구하는 수단으로 전락 해석

 

 

 

 

바탕에 깔려 있는 논리- 안보임 - 우리 사회에선 다른 의미로 해석 - 굳이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맥락에 있으면 된다 -

   우리가 다르게 받아 들여 창조적이 될 수가 있다

   텍스트의 번역과정에서 오역 역시 창조적일수 있다

  굳이 부정적일 필요는 없다

 

 

 

 

다만 맥락이 서로 다르다는 건 알아야 한다

이럴때 어설픈 베끼기가 아닌 재창조가 될수 있다

 

 

 

 

과거 예술 - 그림 그리고 , 철학자가 자기 틀로 해석- 개념의 폭력이 행해짐

현대 예술 - 예술가 스스로 철학을 갖고 있고 실천을 한다

뒤썅 - 예술이 없고 오브제만 있다 - 작품이 아니라 작품인 이유와 철학이 위대

예술가 - 장인의 모델

현대 예술가 - 물성을 잃어 버림, 정신성을 강하게 한다, 작품을 만드는 능력 보다는 기획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상당 부분 철학이 과거와 다르다

 

 

 

현대 예술 - 눈으로만 이해가 불가능

 

 

 

작품을 완성시킬때 이미 들어가 있는 철학이 생겼다

현대예술 - 100 년 경과 되었다 - 지나간 100 년 회고 되기 시작 최근에 연구가 이루어짐

 

 

 

 

작품의 원리가 무었이었는가?

  1. 유럽 고전적 아방가르드

  2. 미국의 50 년 중반 미국식모더니즘 - 60 년대 포스트 모던 ( 컨템퍼러리)

 

 

현대 미학 철학 두가지

   숭고의 미학

            페인팅- 숭고의 파트

   시물라크르 미학 ( 복제 미학 매체미학)

             인상파 작품에서 시작 오늘날 미디어 미학 포토 몽타주, 팝아트, 하이퍼리얼리즘 미디어 아트 비디오 아트 기술복제 수단을 이용한 작품 활동들

 

 

다른 한편

 

뒤샹 1915년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 화가를 선언함

첨병 아방가르드에서 페인터가 없어졌다

많은 경우 두가지는 섞인다 변주 된다- 다양한 조합으로 나타난다

 

 

 

현대 예술의 철학 진중권 1-2

원문 -----------

따라서 인상주의의 이데알 티푸스(이상형)를 상정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이들의 작품들 속에 흩어져 있는 “새로운 표현방식” 때문이리라.

인상주의는 아카데미의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하였다. 고전주의는 중요하고 격조 있는 이념들, 사변적인 관념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선별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들은 현실을 무조건적으로 모방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더 고상하고 더 정화된 모습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들은 역사적 모범들에서 정제해 낸 ‘양식’, 눈에 아첨을 하는 듯한 ‘우아함’,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규약’을 고집했다.

여기에 대해 제일 먼저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은 사실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술에 ‘진리’를 말할 의무를 부과했다. 판타지와 포에지를 배격하고, 그들은 회화에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정직하게 기록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의 주제는 영광스런 ‘과거’에서 빌려온 게 아니라 자신들의 ‘현재’에서 따온 것이었다. 고전주의자들은 제재를 차별했으나, 사실주의자들에게는 현실의 모든 대상이 묘사할 만한 격조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인상주의는 이 사실주의의 연장이자 동시에 수정이다. 인상주의자들은 대개 사실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신성하다”는 블레이크의 모토를, 인상주의자들은 더 세속적이며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수용하였다. 하지 사실주의자들이 가촉적인 현실의 포괄적인 파악을 추구한다면, 인상주의자들은 감각세계로부터 오직 의식에 조정되지 않은 즉각적, 자발적인 시지각의 산물만을 취하려 했다. 그들의 화법(畵法)에서는 인간의 형상과 물의 형상이 구별되지 않는다.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자들이 아직 갖고 있던 ‘시각의 관습’을 버렸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묘사의 내실이 아니라 회화적 피상성이었다. 현대예술을 특징짓는 ‘평면성’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에서 전면과 후면, 하늘과 땅, 인간과 사물, 형상과 배경은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고르게 퍼진 엔트로피의 평면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모든 대상을 색채자극으로 체험하려고 했고, 그 결과 작품은 색점의 집합으로 나타나게 된다. 색은 더 이상 사물 자체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망막에 들어오는 빛의 반사로 간주된다. 대상의 형태 역시 선이 아니라 색점이나 색면으로 표현되기에, 색채의 동요와 함께 형태 역시 고정되지 않고 시시각각 변하는 ‘잠재적 형상’의 성격을 띄게 된다. 지각의 세계가 끊임없이 동요한다면, 그것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 역시 즉흥적 변환의 놀이가 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상성, 미완성, 카오스, 가독 불가능성 등 당대 사람들을 도발했던 인상주의의 특징이 나온다. 실제로 칸딘스키조차도 모네의 작품에서 ‘볏단’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더구나 인상주의자들이 다룬 제재는 모두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대중들이 기대하는 이상적 세계, 이국적 세계, 감상적 일화 등은 존재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이었다. 인상주의자들이 보여준 세계는, 보들레르가 말한 ‘현대적 삶의 낙관적인 파노라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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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피사로 시슬리 -- 본격적인 인상주의

작품속의 새로운 표현 양식

고전주의와 내용상 대립만은 아니다 이미 사살주의자들에서 대립이 시작 되었다-- 쿠르베 의 돌꺠는 사람 - 옛날에는 그림의 주제로 등장 할수 없는 인물

고전주의와 내용의 최초의 대립은 사실주의자들 - 소재에서 차별이 없어졌다

인상주의 역시 그림 대상의 특권주의는 이미 사라졌다

사실주의 기법 자체는 고전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상주의는 - 시각적 형식적 차이가 있다

고전주의는 현실을 미화 아름답게 , 예술 창작의 카논 규칙을 강조 == 아름다운 가상

사실주의 - 예술이 추해져도 된다, 아름다움은 위선일 뿐이다, 추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

내용상의 싸움, 현실의 모든 것이 예술적 묘사의 대상이 된다

팝아트 소재 - 일상 , 만화, 통조림 깡통 - 래디칼한 평등주의 - 사실주의에서 기원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차이

사실주의 - 대상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 객관적인 인식, 눈을 가지고 만질수 있느 속성

인상주의 - 사실주의 수정, 사실주의로부터 출발 , 모든 살아있는것은 신성하다, 세속적인고 급진적으로 수용, 형이 흐물 거린다, 지각의 조건에 따라서 형과 색이 변한다, 사물의 고유색이 없다 - 색이란 빛이 반사된것, 빛의 조건에 따라 색이 달라지기 때문, 사물의 고유색이 없다 감각 세계로부터 지성을 통해 사물을 만들어 내는 전단계, 순간적 감각적 세계를 그린다, 사물이 아니라 빛을 그릴려고 했다,. 시각의 관습을 깻다 . 엔트로피 평면의 상태 - 자유도가 충만한 상태, 대상이 뭐나는 중요하지 않음, 색채 자극으로 본다, 본질은 중요하지 않다.

색이 사물 자체 , 고유 특성이 아니라, 망막의 빛의 자극으로 간주

가독 불가능성

시각의 관습과 다르다

칸딘스키 - 모네의 그림에서 볏단을 알아보지 못했다

벤야민의 - 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대하여

(보들레드- 최초의 현대시 )

산업화 도시화 세속화 꿈이 사라진 냉정한 사회

옛- 풍류, 명예.

현대 - 이익, 계산적

보들레르 - 오늘날에도 서정시가 가능할까?

현대인들의 서정 정서가 바뀌었기 때문, 지각이 바뀌었기 때문 고전주의에서만족하지 못한다

인상주의는 대도시 경험 방식 - 도시적 지각 방식이라고 할수 있다

도시의 속도감, 도시의 군중, 정신없이 지나가는 지각 방식

뚜렸한 윤곽이 아니라 얼룩의 색점으로 인식 한다

지각 세계가 달라진 때문

1-3 인상주의 와 현대 예술의 차이점

원문

◆ 인상주의와 현대예술의 관계

1. 예술적 수단의 자립화: 예술적 모던의 자기규정으로서 ‘자기 지시성’

2. 회화의 피상성과 평면성: 환영주의의 포기. 공간적 깊이의 상실.

3. 제재의 무차별성: 묘사대상의 일상성, 미적인 것의 해체

4. 현대적 지각의 시각화: ‘모던’의 시지각.

5. 포인틸리즘: 화면의 픽셀화, 입자화

<모네-루앵 대성당 연작>

◆ 루앵 성당 앞에서

수련을 그리기 몇 년 전에 모네는 루앵 성당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 번만 그린 게 아니라 같은 건물을 여러 번 반복해 그리고 있었다. 왜? 우리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인상주의의 신조에 따르면 색이란 반사된 빛이다. 그런데 빛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따라서 성당의 제 색을 표현하려면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좇아서 여러 번 그릴 수밖에. 그래서 그는 아침, 점심, 저녁의 성당을 그렸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의 성당을 그렸다.

과거에도 계열적인(serial) 작업을 한 화가들은 있었다. 그래서 똑같은 그림에 여러 개의 버전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묘사 대상의 가장 적확한 표현을 얻기 위해 화가가 같은 대상을 여러 번 그린 결과다. 때문에 이렇게 탄생한 계열적인 작품들 사이에는 모종의 위계질서가 있었다. 말하자면 대상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데에 가장 성공한 작품이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작품이 화집에 그 화가의 대표작으로 오르는 것이다. 그것이 원본을 그린 원작이다.

하지만 모네의 것들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없다. 그림을 보라. 저 다섯 개의 그림 중에서 원작은 어느 것일까? 저 중에서 루앵 성당의 색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한 것은 어느 것인가? 이 물음에 우리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왜? 루앵 성당에는 ‘고유색’이 없기 때문이다. 색이 빛이라면, 그리하여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어느 색을 루앵 성당의 ‘고유색’이라 불러야 하는가? “하지(夏至)날 정오에 본 루앵 성당의 색을 그 건물의 고유색으로 정의한다”,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사물에 ‘고유색’이 있다면 여러 색깔의 작품들 중에서 루앵 성당의 색조에 가장 가까운 것을 하나 고를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고유색’이 없다면, 어느 게 루앵 성당의 색조에 가장 가까운지 말할 근거도 사라지게 된다. 회화의 진리가 재현의 올바름에 있다면, 저 다섯 개의 그림들은 모두 옳다. 저들 사이에 위계질서란 있을 수 없다. 루앵 성당의 본 모습은 하나의 그림 안에 남김없이 현현(顯現)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차이의 놀이 속에, 말하자면 조금씩 달라지면서 이어지는 저 무한한 계열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 현실의 사라짐

그림을 인쇄하려면 색 분해를 해야 한다. 이때 총천연색의 그림이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 그리고 그림에 명암을 줄 검정으로 이루어진 네 장의 필름으로 분해된다. 이것들을 걸어놓고 순차적으로 네 번 인쇄해 비로소 종이 위에 총천연색의 그림을 얻어내는 것이다. 다시 <루앵 성당> 연작을 보라. 각각의 작품들이 거의 단색에 가깝지 않은가? 마치 한 장의 총천연색 사진을 색 분해해서 얻어낸 필름들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성당의 고유색은 여러 개의 단색의 필름들 속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저 그림들 속에서 견고한 물성(物性)은 느껴지지 않는다. 돌이라는 석재의 견고함을 잃어버리고 마치 호수에 비친 물그림자처럼 어른거릴 뿐이다. 저것은 성당이 아니라 성당의 인상일 뿐이다. 사물 자체가 아니라 화가의 눈에 비친 환영일 뿐이다. 성당은 어디로 갔는가? 이것이 세잔을 괴롭힌 문제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인상주의 회화가 사물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모네의 작품 속에서 돌로 지어진 견고한 성당은 물성을 잃어버린 채 ‘차이’의 놀이들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원본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원본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의 놀이가 들어선다. 세계는 더 이상 단 하나의 그림 안에 한꺼번에 재현되지 않는다. 현실은 사라졌다. 아니,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은 사라졌다. 이제 세계는 조금씩 모습을 바꾸며 무한히 이어지는 시뮬라크르의 놀이 속에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 듯 그렇게 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이게 현실이며, 이게 현대의 지각이다. 모네는 이 현대인의 눈을 가지고 시뮬라크르의 놀이 속에 현실을 사라지게 한 최초의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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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폭 자체가 중요해진다

화폭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화폭이 불투명해지고 의미가 전달되지 않으므로 화폭 자체가

인식에서 독립된다

인상파 ; 외부의 대상을 재현하는게 목표이긴 한데, 화폭은 불투명 하다 - 화폭이 자립화

현대와의 중간 단계이다

현대회화 ; 완전 불투명이다 , 2 차원의 평면이다 , 회화가 외부의 대상이기 이전에 화구통속의 물감이다

자기 지시감, 현대 회화가 탐구하는것 자기 자신이다 , 형과 색에 대한 탐구이다

2. 회화의 피상성 평면성

현대회화의 강령 - 캔버스에 발라진 물감의 배열 - 2 차원

환영주의의 포기, 공간적 깊이의 사라짐

3. 제재의 무차별성

래디칼한 평등주의

팝아트 뒤샹이 했던것 - 일상을 미술관으로

4. 쇠라, 포인틸리즘

점묘화, 인쇄, 티비, 컴터 = 색점의 나열

형을 만드는건 점이다

ressmblance 유사성 - 고전회화의 원리 - 아버지와 아들 - 원본을 복제 - 위계질서가 있다.

simulitude 상사성 - 현대 복제 예술 - 형제끼리 닮음 , 원본과 일치할 의무가 없는 복제

고정된 실제는 사라짐 - 빛에 따라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

현전 - presence =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 현전의 형이상학은 더 이상 불가능

현대는 무한한 차이의 놀이 시물라크르 의 놀이

2 강 사라짐의 미학 II

2-1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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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 현실의 영웅주의

"인상주의로부터 나는 박물관의 예술과 같은 뭔가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만들려고 했다."

세잔(1839-1906)이 하려고 한 것은 야외에서 푸생을 그리는 것, 즉 “자연을 바탕으로 푸생을 새로이 하는 것”이었다.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자연으로부터 들어온 인상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대신에 그것으로 그림의 질서를 구축하려 하나, 그러면서도 고전주의자들과는 달리 형상화의 과정을 기계적 완성의 도식 아래 집어넣는 것을 거부했다.

똑같이 아카데미에서 강요하는 고전주의적 관습에 대항하면서도,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색의 시각적 혼합과 빛에 대한 숭배를 넘어서 회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려 했다. “인상주의로부터 나는 박물관의 예술과 같은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만들려고 했다.” 시각적 인상 너머에 있는 그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 기념비적 노력을, 그는 “현실의 영웅주의”라 불렀다.

<세잔-벨뷔에서 본 생비트와르산>

현상의 배후에 있는 사물의 추구. 이것이 인상주의의 피상성, 표면성을 거부한 세잔의 문제의식이었다. 이 때문에 세잔의 미학은 숭고의 미학에 가까워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산개되고, 스쳐 지나가 버린다. 자연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머무나, 그것의 현상들의 상으로부터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예술은 자연에 지속의 숭고함을 부여해야 한다. 우리는 자연의 영원함을 비로소 가시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단순한 인상을 넘어, 화폭에 견고한 질서를 부여하고 그 위에서 시각적 종합을 이루려 한다는 점에서 세잔의 작품은 푸생을 닮았다. 하지만 세잔은 푸생과 달리 어떤 고정된 시각의 관습에 의존하여, 미리 완성된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사물이 발생하는 과정을 탄생의 상태에서(in statu nascendi)에서 포착하려 했다. 때문에 그에게 사물성은 완성된 형태로 고정된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새로이 발생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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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

다수의싯점 도입 - 큐비즘의 시초, 원급법적 시점을 포기하게 만듦

대상 -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

야외에서 푸생을 그리는 것이다

자연을 바탕으로 사물성(견고하고 지속성) 을 그리겠다 라는 뜻

세잔은 고전주의와 인상주의를 융합 하겠다...

내 눈에 보이는데로 그리겠다

색점을 그릴려는것이 아니라 사물을 그릴려고 했다

시각적 인상 넘어 있는 견고하고 지속적인것 - 현실의 영웅주의 - 을 그릴려고 했다

시물라크르가 아니라 숭고의 미학이 있다

인상을 통해 본질로 들어간다 - 숭고의 미학이 있다

인상주의 표면성 을 거부 - 시물라크르 넘어서 배후의 본질로 들어간다

우리가 보는것은 모두 산개되고 스쳐 지나가고 사라진다

하지만 자연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 현상들이 상으로 남는것은 없다

우리의 예술은 자연의 영원함을 가시화 해야 한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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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세잔의 작품은 모종의 긴장 위에서 성립한다. 순수한 감각과 형식 논리 사이의 긴장, 혹은 (인상을) 받아들이는 눈의 감수성(=수용성)과 형식을 부여하는 오성의 구성적 고려 사이의 긴장. “그림을 그릴 때에 눈과 뇌는 서로 도와줘야 한다. 색채 인상의 논리적 전개를 통해 양자가 서로 상대방을 형성할 수 있도록 작업해야 한다.” 여기서 그저 세계를 수용하여 보존하려는 겸손함과 그것들을 하나의 형태상의 구조물로 만들어 객관화하려는 예술가의 야심이 하나로 합쳐진다.

세잔에게서는 직접성과 근원성에 대한 추구가 감각의 현실에 대한 전제 없는(고전주의적 시각의 전제들로부터 자유로운) 대결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의 작품에는 현상의 세계에 대한 무의지적인 헌신과 그 세계의 뒤로 육박해 들어가려는 의지의 변증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생성되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의 충돌에서 그는 생성되는 것을 우위에 올려놓으며, 주관적인 것을 거부하려 했다. 여기서 그의 미학은 ‘주체의 죽음’을 선취한다.

여기에는 모종의 종교성이 있다. 세잔은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자립화한 예술적 수단의 유혹에서 벗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주관을 부여하기보다는 자연의 즉자상태를 그러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예술가는 세계창조의 기관이자 영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색채-형태의 점진적인 대상화, 그것과 대상의 만남, 양자를 화해시켜 그림의 구성으로 만들 때, 우리는 색채로부터 사물의 생성되는 과정, 세계가 회화로 형태 변환하는 과정의 목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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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된 원근법은 다르다

시각의 컨벤션을 배제 하고 인상을 구축한다

시점이 여러개 - 큐비즘이 되어 버린다

세잔는 perspective lived - 체험된 원근 - 본대로 그릴려고 노력

다 초점을 구축한다 - 추상으로 간다 - 큐비즘 - 그러나원래 세잔의 의도는 아니였다

모순 패러독스를 해결한 추상보다 위대

2-3

1. 추상

2. 사라짐

3. 미적 주체성의 해체

◆ 사라짐의 미학

루앵 성당은 사라져 버렸다. 묵직한 돌로 된 성당이 필름을 닮은 단색의 웃음들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것이 현실을 사라지게 하는 모네의 방식이다. 현실이 해체된 자리에 남은 것은? 서로 조금씩 차이를 내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시뮬라크르들. <서유기>에 나오는 신통한 원숭이는 제 머리카락으로 수없이 많은 분신을 만든다. 그렇게 끝없이 머리카락을 불어대다가 몸 전체가 그 숨결에 실려 입 밖으로 빠져나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면? 그럼 원숭이는 사라지고 머리카락으로 된 복제들만 남을 게다. 모네에게서 성당의 정체성(identity)은 수많은 ‘차이들(differences)’ 속으로 해체된다.

말레비치는 다르다. 그는 거꾸로 모든 차이들을 지움으로써 세계를 사라지게 한다. 이 경우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검은 사각형 외에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텅 빈 캔버스다. 세상에 존재하는 형태들의 차이는 사라져 사각형으로 환원되고, 그 형태들이 가진 다양한 색의 차이 역시 사라져 검은색으로 돌아간다.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 속에서 사물들의 차이는 사라지고, 세계 전체는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우주의 특이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말레비치에게서 차이들(differences)은 무차별적인 동일성(identity)으로 돌아간다.

<말레비치-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

우주에는 시간과 공간과 질량과 빛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있고, 그렇게 빨아들인 모든 것을 다시 토해놓는 ‘화이트홀’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차이들을 집어삼키는 블랙홀과 차이들을 뱉어내는 화이트홀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연결고리를 ‘웜홀’이라 하는데, 이 통로를 거치면 하나의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다. 벌레가 사과 표면을 기어서 반대편으로 가는 것보다 사과 속을 파먹어 생긴 통로로 이동하는 게 더 빠른 것과 같은 이치다. 모네의 인상주의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의 관계도 서로 붙어 있다는 이 두 개의 구멍과 비슷하지 않을까?

◆ 매체와 숭고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와 그림이다. 모네는 세계의 동일성(identity)을 물그림자 같은 환영들(differences)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했다. 말레비치는 세계의 그림을, 말하자면 캔버스 위에서 대상들의 재현을 사라지게 했다. 세계 자체는 물그림자들 같은 환영들 속으로 해체되고, 세계의 재현은 검은 사각형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자연도 사라지고 모방도 사라진다. 세계도 사라지고 거울도 사라진다. 현실도 사라지고 재현도 사라진다. 이로써 자연의 모방, 세계의 거울, 현실의 재현이라는 고전 회화의 원리는 무너진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세계의 시뮬라크르들, 물그림자처럼 흐늘거리는 세계의 영상들, 견고한 세계가 아닌 세계의 유령 같은 환영들이다. 그뿐인가? 아니, 남은 게 하나 더 있다. 모든 형상이 사라진 흑과 백의 텅 빈 절대주의적 캔버스. 세상의 모든 대상을 집어삼켰다가 다시 뱉어내는 우주의 특이점. 존재자가 튀어나왔다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존재의 근원. 재미있게도 말레비치의 작품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맞붙은 모양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것이 현대인의 세계감정이다. 19세기에 카메라가 발명됨으로써 세계를 재현할 의무를 사진이 떠맡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사물의 영원한 상을 담은 회화가 아니라 순간적 인상을 낚아챈 사진을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재현의 과제를 사진에 넘겨준 회화는 이제 눈에 보이는 ‘존재자’를 재현(representation)할 의무에서 벗어나, 점점 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근원적 ‘존재’를 현시(presentation)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클레의 말대로 “현대 회화는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모네는 단 하나의 성당을 묘사하기 위해 서로 비슷한 그림들의 계열을 그려야 했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사진, 영화, 인터넷 등의 ‘매체미학’으로 그 과제를 해결한다. 물감으로 그려진 연작의 자리에 오늘날에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복제되는 기술적 영상들이 나타난다. 그럼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기획은? 그것은 오늘날 색면추상이나 모노크롬의 ‘숭고미학’으로 계승되고 있다. 현대의 캔버스는 화면을 비우고 단색의 바탕을 지향한다. 어느 미디어 철학자의 말처럼 20세기 예술은 “형상금지(정신화)와 영상의 홍수(기술복제)라는 양면으로부터 협공”당하고 있다.

◆ 세계의 웃음

고양이처럼 세계는 사라지고 세계의 웃음만 남았다. 정말 우습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세계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뉴턴의 우주는 견고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우주는 다르다. 그 안에서 시간은 속도에 따라 줄어들거나 늘어지고, 공간은 중력에 따라 이리저리 휘어진다. 데카르트의 사물은 연장을 가진, 말하자면 길이와 부피를 가진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사물은 다르다. 그 유명한 공식에 따라 길이도 없고 부피도 없는 에너지로 증발해 버린다. 질량은 얼마든지 에너지로 전화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전통적인 세계는 사라져 버린다.

교통과 통신의 발전 때문일 수도 있다. 초음속기와 고속전철은 시공의 관념을 바꿔놓는다. 파리에서 아침을 먹고 뉴욕에서 점심을 먹을 때, 서울로 출근하고 부산으로 퇴근할 때, ‘시간’과 ‘공간’은 해체된다. 게다가 미디어의 발달로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일이 실시간으로 내 방안으로 전송되고, 클릭 한 번으로 대양 건너편의 나라로 날아갈 수 있다. 이로써 시공의 관념은 희미해진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로 보았던가? 그럼 시공이 해체되면서 당연히 세계도 사라질 수밖에.

아니면 지각의 세계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더 이상 우리는 세계를 맨 눈으로 보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대부분 신문, 방송, 인터넷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세계는 이제 육안으로 본 게 아니라 기술 복제된 영상들로 구성된다. 미국에 가보지 않은 나도 미국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사진, 영화, 컴퓨터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내게 미국은 현실인가? 아니면 환영인가? 어느 쪽으로도 대답하기 힘들다. 이렇게 세계는 고양이 없는 웃음처럼 허공에서 녹아 없어지고, 모네의 성당처럼 물위에 뜬 그림자가 되어 흐늘거린다.

◆ 존재와 무

“자동차가 비행기에 추월당하고 있고, 전보와 전화가 무선통신에 의해 낡은 것으로 되는 시점이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마치 집안의 거미줄을 깨끗이 청소하듯이, 도시들을 전화 및 전보의 전선망으로부터 깨끗이 청소하기에 좋은 시기이다.” 말레비치가 이 말을 한 게 1924년. 여기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가 세계의 대상성을 “청소”할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손에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컴퓨터 역시 벌써 무선 인터넷을 실현하고 있다. 견고했던 세계는 텅 빈 공간을 채우는 전자파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점점 사라져 간다. 같은 일이 그의 캔버스 위에서도 일어났다.

내 주위의 공간은 온통 전자파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은 라디오로 들어와 소리가 되고, 텔레비전에 들어와 영상이 되고, 노트북으로 들어와 화상이 된다. 그 소리와 영상과 화상들은 원래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바로 내 몸을 휘감고 있는 공간들 속에 전파의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 것도 없는 저 빈 공간에서는 지금도 온갖 소리와 화상과 영상들이 번개처럼 스치면서 소리 없이 아우성을 치고 있을 게다. 이 이미지들은 물질성이 없기에 환영, 아니 유령에 가깝다. 그것들을 맨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아니,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아이처럼 무서울까?

얼마 안 있어 텔레비전도 디지털 전송으로 바뀐다고 한다. 그렇게 전송된 영상들이 우리 방안을 채우고, 우리는 그 기술 복제된 영상들을 통해 세계를 체험하고, 그것들을 재료로 우리 자신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 복제영상들은 우리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남이 본 것을 촬영해 복제한 것이므로, 그걸로 만들어진 세계는 일종의 ‘매트릭스’가 되는 셈이다. 미디어에서 튀어나와 나의 세계를 이루는 이 환영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환영의 배후로 돌아가려면 말레비치가 캔버스 위에서 대상들을 지우는 것처럼 일단 그 허깨비들의 차이를 하나하나 지워나가야 한다.

소리와 화상과 영상의 차이를 지우면 문자로 된 명령어들이 나타난다. 바로 이것이 모니터 위에 소리와 영상의 환영을 만들어낸 것이다. 명령어들은 다양한 기호와 수식으로 되어 있다. 그것들의 차이도 지우자. 그 문자들의 바탕을 이루는 ASCII 코드는 0과 1의 디지털 코드로 이루어진다. 결국 모니터 위의 그 근사한 환영은 0과 1의 놀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1bit짜리 정보들의 조합이 세계의 환영을 만들어낸 것이다. 등의 점멸(點滅). 하양과 검정. 말레비치의 작품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 컴퓨터 모니터는 <검은 바탕 위의 흰 사각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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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비치 검정 사각형

절대주의 - 모든 것이 사라진다 - 그로부터 다시 생긴다

숭고미학 - 모든 가상이 흑백이다- 가상을 넘어선 근원적 존재

쇠라 - 점묘 회화 - 픽셀 개념 - 하얀 위에 점들 - 표면적이다 - 시물라크르 이다

피상적 표피적이다

로베르트 볼트의 저서

20 세기 형상 금지( 숭고 미학 ) 미학 과 영상의 홍수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다

그리스 신 - 질투. 사랑. 인간적 - 형상으로 존재 - 예술의 형태로 존재

신전의 건축으로 존재

기독교 신 - 형상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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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

15 세기 르레상스 - 고전주의 - 신고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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